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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과 ‘비움’의 美學 - 禪 思想과 卽興의 發顯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우리나라 작가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변화의 조짐들이 감지되는데 그 중 하나가 ‘명상(meditation)'을 주제로 한 작품 계열이다. 그것은 원래 동양 불교, 특히 일본 불교의 禪(zen)에서 유래한 것인데, 20세기 초부터 서양에 건너가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등에서 만개했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역수입된 표현주제 중 하나이다.

 

추상 표현주의 작가 중에서 특히 토비(Mark Tobey, 1890-1976), 클라인(Franz Kline, 1910-62), 고틀리프(Adolph Gottlieb, 1903-74), 그레이브즈(Morris Graves, 1910- ) 등이 불교의 禪을 작품에 활용하였다. 그레이브즈는 “禪이 명상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마음의 표면을 정적(靜的)이게 하며, 내면의 세계를 개화(開花)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레이브즈의 <달과 밀려드는 파도에 미친 까마귀(Moon Crazy Crow in the Surf), 1943>에서 바닷물에 흠뻑 젖은 까마귀가 흐린 하늘에서 그 자체의 후광에 가려진 창백한 초승달만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바로 까마귀로 의인화되어 있어서 그의 정신적 집중은 완벽하게 보이는데, 이러한 경지를 일컫는 일본어인 ‘사토리(satori, 계몽이나 보리)’를 성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상의 세계가 판화가 서경자에게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가? <제9회 서울판화미술제 2003>이래 그녀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크게 두 경향으로 구분된다. 극도로 감정을 억제하고 적막한 고요나 명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그 하나요, 반면에 추상 표현주의의 입체주의적 경향처럼 작가가 자신의 풍부한 감정의 흐름에 주목하고 그것을 거리낌 없이 마치 하나의 전개도처럼 표현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따라서 전자에서는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고 우리를 고요의 바다로 안내한다. 이러한 유형에서는 그레이브즈 회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유사한 정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에 후자에서는 우리를 격렬하고 자유분방한 감정의 궤적으로 안내한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에서는 붓으로 그린 듯한 회화적 분위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그래서 그녀 정신의 집중 현상은 禪의 직접적 활용이거나 즉흥이라는 양태로 나타난다. 그것이 마치 피켜 스케이팅 선수가 은반의 얼음 위에 남겨 놓는 스케이트 날의 궤적처럼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이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다.

 

명상적 회화에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작가가 대상에 대해 가지는 마음의 집중, 신성화의 표현인데, 그레이브즈의 의인화 대상인 까마귀가 그녀에게서는 갈대, 산 능선, 인간, 점들, 바람, 돛단배, 낚시, 석양과 같은 사물이나 자연현상으로 귀착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 그녀는 그레이브즈의 경우처럼 그 형태의 명료성을 꾸준히 추구해가고 있으며, 환경설정에 있어 완숙성도 차츰 정착되어 가고 있다. 또한 그녀가 추상 표현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한 유형에서도 여성 얼굴의 실루엣, 손바닥, 여성 누드 인체, 하트 마크 등을 선묘(線描)와 다채색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또 다른 차원의 완숙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한편, 양자 사이의 형태성이나 색채성에서 차이점도 발견된다. 전자에서는 ‘세련미’ 혹은 ‘질서정연함’이 엿보이며, 후자에서는 ‘프리미티브한 멋’ 혹은 ‘자유분방한 멋’이 엿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양자가 원론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차원으로 환원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전자에서의 ‘세련미’는 오히려 가능하면 표현을 적게 하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서 작가 자신의 정신적 집중 현상에서 유래한 차원으로 귀결되고 있으며, 후자에서의 ‘프리미티브한 멋’은 오히려 그것의 이완 현상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작가 정신의 집중과 이완은 그것들이 동일한 현상의 양면적 정의나 표현인 것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여백처리에 있어서도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자에서는 배경이 거의 단색조로 채워지고 있는 반면에, 후자에서는 근경의 사물들의 표현에만 치중한 나머지 배경에서는 간헐적으로 여백이 보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는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지향하는 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양자가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관점을 지향하는 것으로도 판단된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에서 ‘채움’과 ‘비움’은 ‘양(陽)’ 과 ‘음(陰)’이라는 동일한 진리의 순환고리상 두 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경을 중시한 전자와 근경을 중시한 후자는 ‘양의 세계’와 ‘음의 세계’라는 대립적인, 그러면서도 화해적인 철학적 사고로부터 유래하는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판화가 서경자의 예술세계는 전통적인 판화기법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의 판화는 조금은 도식화된 패턴과 기법을 탈피하고 자신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주목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판화는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본떠서 새겨내는 전통적인 판화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다.

 

또한 그 그림의 내면을 보면 작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페미니즘적 특성의 발현에 주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페미니즘 작가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내면세계의 발현에 충실하고 있음은 분명하며, 따라서 그녀의 작품세계는 우선 작가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정의를 향한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해석함이 타당할 것이다.

 

최병길 (미학박사, 원광대학교 교수)

2004년 2월

​©SUH KYOUNG JA.Western Painter From SEOUL.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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