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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회화: 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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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라는 주제로 전시되는 서경자의 회화시리즈는 단지 회화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예술계의 전반에 또한 글로벌화 되는 세계미술시장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서경자의 모든 작품은 명상이라는 주제와 관계된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을 의미하든 어떻게 실천되든 어떤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던지 말이다.(이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의 축적된 역사의식 안에 Marshall McLuhan에 의해 탄생한 명상이라는 단어는 어쨌든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한다. 실제로 얼마 전 뉴스위크지에서는 동아시아나 인디아는 물론 수백만의 미국인과 유럽인들에게 까지도 선명상요법이 점점 더 확산되어지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다루었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의 각 대표도시 예를 들면 뉴욕 베를린 런던 파리 등에서 스타벅스나 커피빈보다 명상수련원과 요가학원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왜 그토록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남녀들은 명상요법에 매료되는 것일까? 뉴스위크지는 현대인들은 실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유비쿼터스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요가나 명상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명상은 현대문명의 희생자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진정한 방법인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우리는 치유라는 슬로건을 각자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현대문명에 의해 다친 우리들의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 자연환경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삶에 균형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명상은 우리시대의 모토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유는 이 시대의 국적 나이를 불문한 사람들과 예술 과학 학문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요구된다.

 

이번 전시가 명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는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고 그것을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지금 명상에 대해, 명상의, 명상을 위한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평범한 명상이라는 단어는 매우 자주 오용되어지고 오해되어져왔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명상이라는 단어는 인도의 수도승, 달마로부터 중국으로 건너온 불교와 중국고유의 철학인 도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 한자 禪은 중국에서는 ‘첸’, 한국에서는 ‘선’, 일본에서는 ‘젠’이라는 각기 조금 다른 발음으로 알려져 있다.

 

영단어로 하자면 ‘meditation’인 명사는 ‘명상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를 명사화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선명상 즉 비우고 지워낸다는 의미와는 어쩌면 반대되는 뜻이다. 동양의 명상의 개념은 실제 영단어인 ‘meditation’과는 유래 적으로 동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재한 의미는 이렇다. 명상은 생각을 비우고 멀리 띄워 보낸다는 의미이면 ‘명상하다’라는 동사 역시 명상의 단계에 도달하여 절대적인 고요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정신적 정화의 상태에 이르면 모든 욕망이 가라앉고 가려진 모든 막이 걷히고 진정한 영적 존재로서의 나를 깨닫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나 자신인 것이다. 오직 연꽃씨앗만이 연꽃을 피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해야만 인간으로서 진정한 나를 꽃피울 수 있다. 자 이제 서경자의 작품으로 돌아가 이렇게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명상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작품을 통해 다루었는지 살펴보자.

 

[2]

미술평론은 그녀의 작품을 ‘세상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순수한 세계인 이상향에 대한 작가의 욕망을 청명한 블루라는 색채를 통해 대변한다.’라고 했다. 이는 명상의 의미와 반대되고 창조적인 정신적 원리를 따르는 동양 예술철학과도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럼 과연 왜 서경자는 근래의 그녀의 작품에 명상이라는 주제와 함께 블루라는 색채의 사용을 강요하는 것인가?

 

잠시 이 주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적 삶과 평행을 이루는 연꽃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싯다르타 부처가 강연이나 설교 대신에 연꽃을 든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마지막 모습으로 남긴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인간의 정신적인 삶에 있어 개개인의 존재로서도 진정한 나 자신을 꽃피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식물학적으로 연꽃의 일생을 살펴보면 씨앗 안에 웅크리고 잠재되어있던 생명력을 터뜨려 연꽃을 만개하게 한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엄마의 난자에서도 아빠의 정자에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진정한 나 자신은 명상이나 요가와 같은 정신적 수련을 통해 발견되어진다. 연꽃이 작은 씨앗으로부터 스스로를 꽃 피우는 것처럼 우리는 절대적인 고요의 경지를 도달함으로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힘없고 생명이 없어 보이는 작은 씨앗이 싹을 피우고 꽃을 만개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정신적 고요를 통해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각기의 열망과 열정을 꽃피울 수 있다.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 인간은 완전한 고요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면 혼란의 소용돌이가 잠재워지면 모든 티끌들이 가라앉고 청명해진다. 연못안의 모든 티끌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연못은 고요한 수면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인간도 모든 속세의 욕망을 버리고 정신적 고요와 정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개개인의 진정한 정신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선명상의 의미를 이미 이해했던 천주교 신부, Thomas Merton은 ‘선명상은 모든 외부적인 조건과 권위에서의 해방을 통해 인간이 씨앗이 꽃을 피울 때와 같은 진정한 원동력을 경험하게 하고 완벽한 중심 존재로의 나와 조우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정신적 고요를 의미하는 靜(청)이라는 한자는 서경자의 블루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이다. 이 한자는 푸른색의 靑과 혼란과 동요의 爭의 합성어이다. 물의 동요는 가라앉을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불순한 것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따라서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만들어진다. 고요한 물은 맑다. 이는 푸른색을 상징한다. 이 색채를 통해 정신적 휴식, 고요의 단계의 예들이 더욱이 강조되고 증명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마음의 비움을 경험하고 자연스럽게 우주의 모든 것과의 부딪침의 조화를 알게 된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하찮은 미생물까지도) 특정한 파장의 길이와 주기에 따라 균등하게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명상의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마치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처럼 우주에서 10억 개의 파장과 춤을 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Immanuel Kant는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이 탐구는 다양한 인간의 정신적 탐구이며 예술은 정신적 갈망의 표현인 것이라 말했다.

 

이는 서경자의 작품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녀의 모든 작품은 소란의 진원지로 부터의 파장의 퍼짐으로 표현되어진다. 그것이 꽃잎이건 이름 모를 풀이나 나뭇잎이건 파장들은 조화와 부조화를 통해 캔버스 위를 춤춘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보는 이가 맥박과 진동, 파장의 움직임을 심미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서경자의 작품은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고 리드미컬하며 맑은 색조를 가지고 있다. 명상의 단계를 성취하고 고요의 단계를 이해한 그녀의 작품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작품들은 이미 속세의 분류와 감정적 무게, 그리고 온갖 지적인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은 전체적인 환경적 구성, 색채, 리듬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는 예술의 궁극적 성취를 이루는데 있어 모든 고대 동양 예술가들이 이루고자했던 談(단)으로 대변할 수 있다. 단은 고요를 이루고 난 후의 명상의 상태이다. 그리고 블루는 명상의 색채이다.

 

 

[3]

서경자의 명상 시리즈 작품들은 이시대의 한국사회에 특히 한국 미술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요즘 청담동이나 삼청동등에 위치한 패셔너블한 갤러리에 들르면 나는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들과 싸우게 된다. 그 감정은 어디선가에서 너무나 낯익은 작품들의 반복에서부터 오며 이는 유사성에 탈피하지 못한 막연한 지루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 불편한 감정들은 대개 서양식 그림 이라는 반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 나타난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그린 많은 서양화는 잘 그려진 서양화로 보이기는 하나 미적인 측면에서 나눠지는 확실한 뭔가가 부족하다. 그들의 최악은 모조품으로 보여 질 때며 최상의 전시는 놀랍게도 동양적이라도 불리는 신선한 감각과 이국적인 터치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서양식을 모방한 것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미국인 평론가 Clement Greenberg이 나에게 말하길 동양 예술가로서는 ‘소수의 일본인들 있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의 말이 요즘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여기에 많은 한국 예술가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설치미술 미디어와 테크노 예술이라는 유행에 휩쓸리고 있는 지금 파리 뉴욕 런던 중심의 국제적 유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있다. 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은 서구문명의 공허한 허무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예술의 기교만을 발전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예술의 정신적 황폐화를 포함해 그들의 문화전체가 피폐해지는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서구의 전위적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걷는 서경자라는 작가가 있다’라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이미 사장되고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물론 서경자 작가와 같이 예술 활동의 주제로서 명상을 택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며 이는 역사적 파장과 앞께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4]

이미 앞에서 서경자의 예술가로서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한바 있지만 서경자의 블루는 그 색채에서 주는 창조적인 톤을 가지며 또한 그녀의 감정적인 톤까지 보여준다. 이는 단지 고르게 채워진 블루의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든 작품을 통해 고르게 나타난다. 이는 일반적인 평가가 아니며 현대미술계의 종사자들은 감성을 대변하는 고른 색채를 이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이해할 것이다. 특히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적인 21세기에서는 더욱이 예술가로서의 대단한 업적이다. 사실 ‘단’의 고른 상태는 진지하고 진정한 명상의 원리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고요의 상태는 연꽃이 싹을 틔우는 과정과 같이 매우 정신적인 활동인 속세의 모든 것을 비워내는 결과로 얻어진다. 예를 들어, 동물과 식물의 세계를 막론하고 더러운 연못에서 자란 연꽃은 생명체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꽃을 만개 시킬 수 있다. 그리고 활짝 핀 연꽃은 어떠한 색채로 표현될 수 있는가? 그렇다 이는 ‘단’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석가모니가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연꽃잎을 들어 올린 것에 대해 여전히 궁금한가?

 

오직 명상의 단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인간은 완전한 고요 안에서 마음을 비울 수 있고 이는 사람이 진정한 자신의 삶의 원동력으로서 본래의 잠재력을 깨닫게 한다. 연꽃잎 씨앗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씨앗을 발견하고 자기 스스로를 잘 돌봐 만개까지 이루어내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각기 다른 생김으로 태어나 자신만의 잠재력을 가지는 한 인간 개개인은 모두 특별하다. 사실 이것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돌 두 개도 같지 않다.’ ‘석공은 좋은 돌을 알아본다.’ 당신은 어느 돌이 되고 싶은가?

 

바닥의 곡식은 나머지와 한데 모아지고 또 다른 것들과 섞인다. 많은 곡식들은 다양한 곳에서 와서 한곳에 쌓여지게 된다. 곡식의 축적은 같은 크기와 무게, 또한 같은 화학적 성분별로 모아진다. 그렇게 같은 과정을 통해 선택되어 한 곳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한 층으로 함께 모인다. 다양하게 섞인 곡식들은 거름통에 쌓인다. 그렇게 덩어리를 이루고 축적된 것들은 층을 이뤄 쌓이고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침식작용을 통해 단단해져 돌이 된다. 최초의 거름이 단단히 굳고 그것이 원래 만들어 질 때 형성되는 각각의 유일한 곡식 패턴의 형태를 가진다.

 

그것이 잠재적인 가능성의 형태인 것이다. 원석을 찾아내는 활동은 돌의 종류와 질을 분류하는 도구로서 내세워진다. 그러나 원시적 방법으로 건설이나 조각에 필요한 잠재적인 원석을 골라내는 이 행위는 서경자 그녀의 작업 안에서 지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직관력이 강한 조각가라 해도 원하는 특정한 모양의 재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그것을 마음에 들게 다듬기도 쉽지 않다. 조각가는 그 재료의 형태에 대해 예민하게 이해하고 온도적 성격이라든지 그 돌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야 재료와 작가의 협동에 의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이는 마치 초밥을 만드는 쉐프가 초밥을 만들 때 섬세함과 이해를 바탕으로 요리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위의 내용과 연결하여 상상해 보자. 돌을 조각하는데 있어 전자동 최신기기를 사용하고 상업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다면.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조각하는 학생들에게 이 편리한 기기, 재료의 성질에 관계없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주는 이 마법 같은 도구가 있다면 어떨까? 당신이 전자동 도구를 사용한다면 당신은 조금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간편히 어떠한 재료를 막론하고 다룰 수 있다.

 

이러한 전자동 기구들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층들이 더 복잡하고 조합적인 형태로 깔려있다. 산업화된 제품들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고 또한 산업화를 통해 우리에겐 현명한 경제가 약속되어졌다. 기술발달이란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기술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표현했다. 기술은 그것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겐 종교이다. 현대의 샤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형태는 기술의 발전이 결정지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기술발달낙관주의자들의 다방면을 통한 기술의 사용으로 사람이 일을 하는 모든 노동 분야, 패션을 비롯해 교육, 음식, 미용, 오락, 농업, 의학까지 모두 산업화 되었다. 심지어 환경산업조차 기술낙관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졌다. 과도한 기술의 발달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관광객을 위해 150층짜리 빌딩을 건설하는데 있어 거침이 없다. 왜 그 빌딩이 필요한 것인가 어떠한 점이 좋은가는 이미 상관없다. 현대의 우리는 이미 너무 자주 많은 것을 기술의 척도에 의해 결정한다. 만들 수 있으므로 만든다. 필요여부에 관계없이. 이런 현대인의 삶은 허무주의 이외에 무엇도 아니다.

 

현대사회의 기술적 허무주의는 아직 말하지 않은 원칙 하나를 명백히 전제한다. 미래에는 모든 가공하지 않은 재료들의 가치를 똑같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게 사람일 지라도. 물론 기술낙관론자들은 계속적으로 기술발전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이는 또 다른 마케팅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발달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는 모든 면의 획일화를 부추긴다. 이런 예는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림의 가격은 이제 주식의 가격처럼 예술계 종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에 관심이나 있는가?

 

하이데거의 현대기술문명의 기초적 균열에 대한 비관적 진단은 정확히 맞았다. 그는 현재의 형태에서 현대기술문명의 재배열을 위한 정신적 힘을 가진 유일한 열쇠로 예술을 보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바랐던 누구나 존경하고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서산대사의 말을 빌러 표현 할 “한 물건”을 창조할 예술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서경자의 예술적 성취의 또 다른 측면은 현대문명사회에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다른 시각으로 봐 주는 관객이 있다는데 있다. 대신에 그녀는 그녀의 관객들에게 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각각의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보고 존경과 관계를 중요시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 작업을 그녀의 작품을 통해 작고 연약한 꽃잎이나 하찮은 나뭇잎을 통해서라도 우주의 파장을 전달하는 작업을 보여줄 것이다.

 

오늘날 파리, 뉴욕, 런던을 무대로 패셔너블하고 화려하나 과장된 전위 예술들이 팽배하는 동안 서경자의 작품은 우리시대의 영혼으로서 요구되어지고 완성되어지고 있다. 만약 이번기회를 통해 서구의 산업화된 예술에서 눈을 돌려 동양의 정신적 원천들은 돌아본다면 이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예술의 정신적 지주이자 21세기의 새로운 예술시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친 힘의 이동은 실제로 2차 세계대전이후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루어진 바 있다. 작가 서경자를 비롯해 오늘날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21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목소리가 되어 주기를 희망차게 기대해본다.

 

홍가희 지음

최지현 옮김

2011.11.15

​©SUH KYOUNG JA.Western Painter From SEOUL.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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