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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이상향의 이미지

- 오토매티즘과 모노크롬 회화의 절충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평론가인 그린버그(Clement Creenberg, 1960-94)는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 1960)’라는 글에서 “평면성(flatness)만이 모더니즘 회화에 유일하고도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평면성 혹은 2차원성은 회화가 다른 어떤 미술과도 공유할 수 없는 조건이기에 모더니즘 회화는 평면성에 기원을 두는 것이다”라고 모더니즘 회화의 대표적인 특성을 평면성으로 규정한 바 있다.

 

‘현대 회화가 평면성으로 회귀하고자 한다‘는 것은 회화의 역사적인 측변에서나 아니면 그 본질에 있어서도 일대 반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창안한 공기원근법, 화면에서 그로 인한 환영(幻影,illusion)과 눈속임(Trompe I'oeil) 기법의 지속적인 사용이 이끌어온 기나긴 미술사를 송두리째 뒤엎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평면성’이 이 서경자 회화작품의 특성 중 하나로 나타난다. 그녀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그것은 수채화 물감처럼 물에 개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감성의 표출에 적합한 재료이다. 그것은 또한 추상 표현주의의 특성 중 하나인 ‘평면성’의 실현에도 적합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필경 작가의 내면세계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재료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서경자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명상에 기인한다. 요즈음에 제작하고 있는 <명상> 시리즈는 그러한 단면을 읽게 해준다. 그녀는 작품을 매우 빠르게 제작한다. 동양의 선(禪)에 매료되었던 현대 도예작가인 볼커스(Peter Voulkos, 1924-2002)는 제자들과 더불어 그릇을 2분 안에 만드는 훈련을 거듭한 적이 있다.

 

그 과젱에서 그는 무념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형태를 만들고 싶다든디, 어떤 유약을 칠하고 싶다든지 등 일반적으로 작가가 작품제작에서 가지는 생각들을 떨쳐버렸던 것이다. 그는 오로지 만든다는 행위 그 자체에만 만족하고 자신의 마음과 손을 내맡긴 것이다.

 

이번 <명상> 시리즈의 사물들은 화면 속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으며, 화면의 상부 형태가 차지하는 공간이 하부의 것보다 크게 되어 있음은 역원근법과 같은 도치법의 일종이다. 회색빛 바탕의 상부 공간을 차지하는 푸른색의 나무줄기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나선형의 드로잉 위에 채색된 초록색이 무념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흔적으로 남아 있으며, 세필로 그어놓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잔잔한 바다 위의 잔물결처럼 출렁이고 있다. 그녀 작품의 전체적인 색상이 모노크롬적인 경향으로 바뀌고 있음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사물들은 그 형상에서 매우 구체성을 띠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경향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그녀의 모노크롬 경향은 청색을 지향한다. 마치 어린이의 마음의 고향이 푸른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푸른색은 이상향의 대명사이다. 굵고 곧은 나무줄기의 모습처럼 이상향에 대한 그녀의 동경은 매우 솔직하고 강렬하다.

 

나무줄기의 은은한 음영을 드러내기 위하여 붓끝으로 진한 청색을 찍듯이 줄기의 변을 따라 터치들을 나열해 놓고 있지만, 그것은 원근법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것은 청색을 통한 이상향이라는 이미지의 부각을 위한 방편일 것이다.

 

그녀의 의식세계 저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서 무채색인 회색으로 점철된 작품의 배경은 매우 광활하다. 그 일부 공간에 횡으로 난 간헐적인 선묘(線描)에서 그녀의 잔잔한 의식의 흐름을 읽게 되지만, 그것이 그녀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을 결코 흔들어 놓지는 못한다.

 

사물들의 윤곽선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다. 말하자면 나뭇가지의 윤곽선은 매우 정선되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물들의 윤곽선은 거칠기도 하고 둔탁하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필자로 하여금 일본 작가들이 선(禪)을 예술에 적용시킬 때 언급하는 ‘사비’를 연상하게 만든다. 무념의 상태에서 그어대는 선이나 형태는 그것이 반드시 자연스러움만을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교함과 서투름, 예리함과 둔탁함이 적절하게 공존하는 것이 바로 ‘사비’의 세계이다. 서경자의 사물에 나타난 형태들의 윤곽선을 그러한 관점과 관련지어 논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이다. 서경자의 회화세계는 매우 특이하다. 판화 작가로 시작한 그녀의 회화작품에서 간헐적으로 판화기법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녀는 판화이든지 회화이든지 간에 자신 심상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왔는데, 위와 같은 표현방식들이 추상 표현주의의 그것들과 매우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액션 페인팅 기법을 소화해낸 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어느 덧 오토매티즘에 매료되어 있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모노크롬 기법과 오토매티즘 기법의 절충형을 선보인 것은 그녀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최병길 (철학박사, 원광대학교 교수)

2005년 8월

​©SUH KYOUNG JA.Western Painter From SEOUL.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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